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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뗀 우리 한방의 과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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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1441
  • 2013.09.22 23:11
경희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배현수(42) 교수는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식사 시간이 따로 없어 조교가 사다주는 컵라면과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허다하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자는 것으로 부족한 수면 시간을 메운다. 배 교수는 한의사이면서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우선 미국 시카고의 일리노이 주립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미국 생화학·분자생물학회(ASBMB) 정회원이며 사이언스·JBC(Journal of Biological Chemistry) 등 국제적인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10여 편이다.

그는 경희대 한의과 재학 시절 학업 성적이 우수했다. 졸업 후 한의사로 탄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미국으로 갔다. 과학적 검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의학이 경시되는 풍조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한의사로서의 지위와 금전적인 만족보다는 학문적 인정을 받고 싶어 미국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기초의학을 공부해 그들의 언어와 논리로 한의학을 설명하면 한의학의 학문적 깊이와 조상들의 지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배 교수는 1992년 미국의 일리노이 주립대 의대 생리학 박사 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 늘 바쁘게 지내왔다. 학교 측은 한의학을 전공한 배 교수의 능력을 못미더워 했다. 그래서 한 학기의 검증 기간을 가진 다음 진로를 결정한다는 조건부 입학이 허락됐다. 그러나 한 학기 내내 피나는 노력을 한 그는 과 수석을 했다. 장학금은 물론 그와 함께 연구하기를 희망하는 교수도 나섰다.

그리고 생명과학을 통해 한의학을 규명하고 발전시키려는 그의 꿈도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배 교수가 발표한 논문들은 주요 전문 학술지에 꾸준히 게재됐고 노스웨스턴 의대·하버드 의대 등 최고의 명문 대학 연구진과 공동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인간 지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던 미국 과학계에서 분자생물학을 통해 한의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신경계를 설명한 그의 논문이 흥미롭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99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국내외 주요 연구단체들과 연계해 기초과학을 통해 한의학을 검증해오고 있다.

배 교수는 지난해 11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지능형생물정보사업단 단장 박병철 박사팀과 함께 국제 과학 학술지인 프로테오믹스에 녹용 단백질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3년에 걸쳐 녹용의 유전자 염기서열과 단백질 8백 개를 질량 분석해 이를 지도화했다. 녹용의 어떤 성분이 몸에 유익한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영국·미국·호주·일본 등의 1백여 관계 기관에서 연구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배 교수의 연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이 연구는 과학기술부에서 생물정보화 사업을 시작하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 한국인의 실생활과 가까운 녹용의 생물학적 정보를 규명하는 연구 계획을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박 단장은 한의사와 함께하는 연구를 곤혹스러워 했다. ‘한의사는 비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가 시작되자 박 단장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배 교수가 보여준 학문적 능력뿐 아니라 그를 통해 이해하게 된 한의학의 세계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박 단장은 배 교수에 대해 “한의사와 과학자 사이의 통역원”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자의 언어와 한의사의 언어를 다 이해하고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백 년간 임상을 통해 한의학이 계승 발전된 점에는 분명 이유와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박 단장은 한의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한의학과 자연과학을 연결해줄 수 있는 “배 교수 같은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연구 결과도 좋았다. 배 교수는 한약 성분을 규명하며 녹용 성분을 이용한 신약 개발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됐고, 박 단장은 녹용의 특성을 이용해 생명공학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녹용 연구에 참여했던 한국생물공학연구원의 이도희 선임연구원은 녹용이 가진 재생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녹용은 포유류가 가진 조직 중 가장 강한 재생력과 성장력을 가지고 있다. 하루 1~5cm라는 놀라운 속도로 분화하면서도 성장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성장을 중지한다.

녹용은 포유류가 재생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세포 덩어리이기도 하다. 무분별하게 성장을 계속하는 암세포 성장에 관한 연구나 재생을 필요로 하는 연구에 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선임연구원은 “포유류 단백질 유전자의 90%는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고 지적하며 “아직은 사고로 팔을 잃은 사람에게 새 팔을 만들어주는 것은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온다.

하지만 모든 과학은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며 녹용 연구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박 단장은 “녹용 단백질 연구를 통해 우리 조상들이 녹용의 효능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신기하다”며 “수백 년간 한의학이 벌여온 임상 치료를 기초로 보다 심도있는 연구를 실시한다면 가치있는 과학적 발견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희대 한의과 대학 신민규 학장은 “생명과학을 통해 한의학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방을 과학적 언어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더 빨리 진행된다면 한·양방 분쟁을 줄일 수 있음은 물론 한국 한의학의 국제적 위상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 학장은 지난 수 년간 환자들에 대한 임상 정보와 DNA 특성을 통계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침을 놓을 경우 빠른 반응을 보이는 환자와 무반응을 보이는 환자가 있다. 침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의 DNA 구조를 분석하다 보면 그룹별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유전적 특성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다 보면 각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맞춘 치료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진료 시 간단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환자의 체질을 과학적으로 판단한 다음 그에 맞는 치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신 학장은 지금까지의 DNA 분포도가 사상의학에서 설명하는 체질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신 학장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인간 지놈 연구를 한의학에 적용하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일부 한의학자와 단체들 사이에서 한방의 과학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과학적 기초 확립과 임상 분야에 대한 연구는 아직 요원하다. 국내 한방의 과학화는 얘기를 꺼내기도 민망할 정도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수 년간 연구 활동을 해왔던 원광대 한의학과의 전병훈 교수는 “한국 한의학계는 아직 과학성 입증의 가장 기본인 한약재와 진단의 표준화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은 지난 1월 전국 11개 한의대 중풍 전문 연구자들과 함께 ‘한의 중풍 진단 표준화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한의학의 각종 진단지표들이 임상적으로 유용함에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는 객관적인 자료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료 기준과 처방이 표준화되지 않았는데 통계 자료를 수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최선미 연구원은 국내에서 ‘한방 진단의 표준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단의 정혁 단장은 한국의 한약 산업에 대해 “양약과 비교할 수 없음은 물론 아예 산업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 단장이 한약업계를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약재 자체에 대한 기록은 물론 약초 성분 추출물과 그 효능에 대한 자료 수집에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한약 제작 시 사용하는 약재가 언제 어디서 채취됐고, 몇 년산이며 뿌리·줄기·잎 가운데 어떤 부위가 어느 정도의 양만큼 사용되었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없다.” 정 단장은 “임상 효과에 대한 자료 수집을 원한다면 사용 약재에 대한 자료를 완전히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일 사용 약재의 양과 성분이 일정하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임상 자료를 모아도 실효성있는 연구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 한국에서 사용되는 한약재의 90%는 중국산이다. 일반 시장에서 출처 확인도 안된 채 구입한 약재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정 단장은 2000년부터 4천 종에 달하는 국내외 식물표본을 수집해 식물추출물은행을 구축해왔다.

이를 통해 산·학·연 등 각계의 연구를 돕고 있는 정 단장은 한의학계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표준화를 들었다. 효능의 과학적 검증을 받아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한방업계가 이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조상들이 개발한 귀중한 자산들이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정 단장이 경고하는 이유는 미국·중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동양의학의 발전이 이뤄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서양의학의 한계와 부작용으로 인해 대체의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미국에서 동양의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활발하다. 90년대 초반부터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NIH는 대체의학에 관심을 두고 국가 정책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남미·아프리카에서 사용되던 약초의 효능과 특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동양의학에 대한 연구 분석이 그 주된 내용이다.

NIH에서 미국측 연구 실태를 경험한 전병훈 교수는 “체계적인 정보 수집은 물론 구체적인 한방 치료 방식에 대한 연구 수준에서도 미국의 동양의학은 한국 한의학을 크게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미 정부는 2001년 기준으로 한방의학 분야에 1천2백조 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한국의 경우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적다. 지난 1월 국정감사에서 이형주 한국한의학연구원장은 한해 연구비가 50억 원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한 국회의원이 “연구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인데 차라리 그만두는 게 어떤가”고 물었고 이 원장은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희망적인 이야기도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 책임연구원의 최근 연구에서 한방의료에 대한 가장 큰 변화를 ‘한방이 과거에 비해 많이 과학화’된 것으로 답한 응답자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 책임연구원은 “X선 검사와 혈액 검사 등을 실시하는 한의원이 늘고 있고 정부와 한의학계의 연구·개발 홍보가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80%의 응답자가 ‘더 많은 사람이 한방을 찾을 것’이라고 답해 한방에 대한 신뢰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조 책임연구원 역시 임상에 대한 통계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양방에서 새로운 신약이나 진료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검증을 거치듯이 한방도 궁극적으로 객관적·과학적 검증을 통해야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국민들이 더 편하게 한방 치료기관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들도 한의학의 미래가 희망적인 이유다. 지난해의 경우 전국 11개 한의대 입학 학생들의 수능성적은 전체 0.1~0.3% 이내였다. 경희대 신민규 학장은 “한국 한의학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한의학계로 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중·일에서 사용되는 한방 용어·진료지침, 그리고 경혈의 위치를 규격화해왔다. 하지만 주요 한방 용어는 중국식으로 표준화되고 있다.

국제 사회에 먼저 한방을 소개한 점도 있지만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1980년대부터 한방 표준화에 먼저 나선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꾸준히 수준 높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또 의료보험 적용 시 동일한 혜택을 받는 등 사회의료제도로 이미 정착했다. 동양의학이 가진 대체의학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서 한방의 표준화를 서두르지 않는다면 신약 개발 등 산업화에서 다른 나라에 뒤질 수밖에 없다고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최선미 연구원은 말했다.
 
출저 : 중앙일보 뉴스위크 673호 (2005.03.25) 조 용 탁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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